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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쿠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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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토쿠 천황은 일본의 제36대 천황으로, 645년 을사의 변 이후 즉위하여 다이카 개신을 주도했다. 그는 나니와쿄를 건설하고 수도를 나라로 옮겼으나, 황태자 나카노오에와의 갈등으로 인해 재위 말년에는 실권을 잃고 사망했다.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 백제, 신라 등 한반도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다이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핫쇼 캇칸 제도를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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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쿠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칭호야마토 대왕
재위645년–654년 (서기)
이전고교쿠 천황
이후사이메이 천황
추존 칭호 (한풍 시호)고토쿠 천황 (孝徳天皇)
추존 칭호 (일본풍 시호)아메요로즈토요히노 스메라미코토 (天万豊日天皇, Ameyorozutoyohi no Sumeramikoto)
카루 (軽, Karu)
출생 연도596년 (서기)
사망 날짜654년 11월 24일
사망 장소도요사키노미야 (오사카)
능묘오사카노시나가노 미사사기 (大阪磯長陵, Ōsaka-no-shinaga no misasagi), 오사카 이소나가 릉
통치
재위 기간645년 - 654년
연호다이카, 하쿠치
수도난바 궁
거주지난바 궁
가족 관계
배우자하시히토
자녀아리마 황자
아버지지누 왕자
어머니기비츠히메 공주
왕조
왕가일본 황실

2. 생애

비다쓰 천황(敏達天皇)의 후손이자 지누 왕( 茅渟王|지누노오jpn)의 아들로, 어머니는 기비노히메 왕( 吉備姫王|기비히메노오jpn)이다. 고교쿠 천황(皇極天皇, 훗날의 사이메이 천황)은 그의 친누나이다. 즉위 전 이름은 가루 황자(軽皇子|가루노오지jpn)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는 불교를 존중하고 신토는 경시하였으며, 온화하고 어진 성품으로 유학자를 아꼈다고 한다.[15][19]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은혜로운 조치를 자주 내렸다고도 전해진다.[19]

645년, 조카인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가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를 암살한 을사의 변 이후, 누나인 고교쿠 천황이 양위를 결정하자 황위에 올랐다. 이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군주가 생존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양위였다.[19][16] 나카노오에 황자가 황태자가 되었고, 아베노 우치마로(阿倍内麻呂)가 좌대신으로,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蘇我倉山田石川麻呂)가 우대신으로,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子, 훗날의 후지와라노 가마타리)가 내신(内臣)이 되어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19][11] 승려 민(旻)과 다카무코노 겐리(高向玄理)는 국박사(國博士)로 임명되었다.[19]

즉위 직후인 645년 6월 19일(양력 7월 17일), 일본 역사상 최초로 다이카(大化)라는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19][16] 이듬해부터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이라 불리는 일련의 정치 개혁을 추진했다고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으나, 그 개혁의 실제 범위와 내용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논쟁이 있다.[19]

치세 동안 오사카 지역에 나니와쿄(難波京)라는 새로운 도읍을 건설하고 야마토국에서 천도하였다.[6][15] 대외적으로는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교류하였으며, 특히 신라에서는 훗날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金春秋)가 사신으로 오기도 했다.[20] 653년에는 당나라에 사절을 파견하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북방의 에미시에 대비하기 위해 누타리노 사쿠(渟足柵)와 이와후네노 사쿠(磐舟柵)를 고시국에 설치하고 사쿠코(柵戸) 제도를 시행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황태자인 나카노오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653년 나카노오에가 수도를 다시 야마토로 옮기자고 제안했으나 고토쿠 천황이 거절하자, 나카노오에는 상황인 고교쿠 천황과 왕족, 대부분의 신하들을 이끌고 야마토로 돌아가 버렸다.[17] 나니와 궁에 홀로 남겨진 고토쿠 천황은 크게 실의에 빠졌고, 이듬해인 654년 병으로 사망하였다.[6][17] 그의 사후, 황태자 나카노오에는 즉위하지 않고 누나이자 선대 천황이었던 고교쿠 천황이 사이메이 천황으로 다시 즉위하였다.[6]

2. 1. 가계 및 즉위 전

고토쿠 천황이 황위에 오르기 전 개인 이름(이름)[4]은 軽|가루jpn 또는 軽皇子|가루노오지jpn(가루 황자)였다.[5]

그는 비다쓰 천황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지누 왕(茅渟王|지누노오jpn)이며 어머니는 기비노히메 왕(吉備姫王|기비히메노오jpn)이다. 누나는 고교쿠 천황(훗날의 사이메이 천황)이다. 아버지 지누 왕은 비다쓰 천황의 첫째 아들인 오시사카노히코히토노오에노미코(押坂彦人大兄皇子)의 아들이며, 어머니 기비노히메 왕은 긴메이 천황의 손녀이자 사쿠라이노미코(桜井皇子)의 딸이다. 따라서 고토쿠 천황은 나카노오에노오지, 하시히토노 히메미코, 오아마노오지의 숙부가 된다.

그는 생전에 최소 세 명의 배우자를 두었다. 황후는 자신의 조카이기도 한 하시히토노 히메미코(間人皇女|하시히토노 히메미코jpn, ?~665)로, 조메이 천황과 누나 고교쿠 천황 사이의 딸이었다. 비(妃)로는 아베노 우치마로(阿倍内麻呂|아베노 우치마로jpn, ?~649)의 딸인 오타라시히메(小足媛|오타라시히메jpn)와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蘇我倉山田石川麻呂|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jpn, ?~649)의 딸인 지노이라쓰메(乳娘|지노이라쓰메jpn)를 두었다. 오타라시히메와의 사이에서 아들 아리마 황자(有間皇子|아리마노 황자jpn, 640~658)를 낳았으며, 그 외 다른 자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서기》의 평가에 따르면, 고토쿠 천황은 불교를 존중하고 신도는 경시하였다.[15][19] 성품은 온화하고 어질었으며 유학자를 좋아했고,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자주 은혜로운 조서를 내렸다고 한다.[19] 또한, 소가노 이루카를 피해 셋쓰국 미시마(三島)에 은거하던 나카토미노 가마코(훗날의 후지와라노 가마타리)가 즉위 전의 가루 황자 시절에 그에게 접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일본서기》 고교쿠 천황 3년 정월 기록).[16]

2. 2. 을사의 변과 즉위

645년(고교쿠 천황 4년) 6월 12일(양력 7월 10일), 황태자 나카노오에노오지소가노 이루카를 암살하는 을사의 변이 일어났다.[19][16] 이 사건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소가 가문의 몰락을 가져왔다. 사건 다음 날, 고교쿠 천황은 아들 나카노오에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나카노오에는 이를 사양하고 자신의 숙부이자 천황의 동생인 가루노오지를 추천했다.[6][16] 가루노오지 역시 여러 차례 사양했지만, 나카노오에의 강한 의지로 결국 6월 14일(양력 7월 12일) 고교쿠 천황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하게 되었다.[6][7] 이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군주가 생존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양위 사례로 기록된다.[19][16]

즉위 후, 퇴위한 고교쿠 천황에게는 皇祖母尊|스메미오야노미코토일본어라는 존호가 주어졌으며, 나카노오에노오지는 황태자로 책봉되었다.[19][16]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주요 관직도 임명되었다. 아베노 구라하시마로가 좌대신(左大臣)에,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가 우대신(右大臣)에 임명되었고,[19][11] 을사의 변을 주도했던 나카토미노 가마코는 내신(内臣)이 되어 천황을 보좌하게 되었다.[19][11] 또한 학문적인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승려 민(旻)과 다카무코노 겐리(高向玄理)가 국박사(国博士)로 임명되었다.[19]

고토쿠 천황은 즉위 직후인 6월 19일(양력 7월 17일), 황조모존과 황태자와 함께 여러 신하들을 모아 새로운 체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16] 같은 날, 일본 역사상 최초로 다이카(大化)라는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조치였다.[19][16] 이 연호는 650년 하쿠치(白雉)로 개원하기 전까지 약 5년간 사용되었다.[19]

일본서기』에 따르면 고토쿠 천황은 불법(佛法, 불교)을 숭상하고 신토(神道)는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온화한 성품으로 유학자를 아꼈다고 전해진다.[19][15] 귀천을 가리지 않고 자주 은혜로운 조서를 내렸다고도 한다.[19]

2. 3. 다이카 개신 (大化改新)

고교쿠 천황 4년(645년) 6월 12일(양력 7월 10일), 나카노오에(中大兄) 황자가 소가노 이루카를 암살하는 을사의 변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고교쿠 천황은 나카노오에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나카노오에는 이를 사양하고 자신의 외숙부인 가루 황자(고토쿠 천황)를 추천했다. 가루 황자 역시 여러 차례 사양했지만 결국 6월 14일, 고교쿠 천황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천황으로 즉위했다. 이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국왕이 생존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양위였다.[6] 전 천황인 고교쿠에게는 스메미오야노 미코토(皇祖母尊)라는 존호를 올렸고, 나카노오에는 황태자가 되었다.

즉위 후 고토쿠 천황은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주요 인물들을 등용했다. 아베노 우치마로(阿倍内麻呂)를 좌대신으로,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蘇我倉山田石川麻呂)를 우대신으로 삼고[11] 나카토미노 가마코(中臣鎌子)를 내신(内臣)으로 임명했다.[11] 또한 승려 민(旻)과 다카무코노 겐리(高向玄理)를 국박사(国博士)로 삼아 개혁 정책의 자문을 맡겼다.

고토쿠 천황은 즉위 직후인 645년 6월 19일(양력 7월 17일), 일본 역사상 최초로 다이카(大化)라는 연호를 제정했다.[12] 이 연호는 하쿠치(白雉)로 개원하기 전까지 약 5년간 사용되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고토쿠 천황은 다이카 원년(645년)과 이듬해에 걸쳐 여러 분야에서 제도 개혁을 단행했는데, 이를 후세에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이라고 부른다. 이 개혁을 통해 핫쇼 캭칸(八省百官, 8성 100관)과 같은 새로운 관료 제도가 처음으로 정비되었다고 전해진다.[8] 그러나 《일본서기》에 기록된 '개신의 조(改新の詔)' 4개 조항 중 일부(제1조와 제4조)는 후대의 제도를 바탕으로 내용을 수정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서기》에서 묘사하는 것과 같은 대대적인 개혁이 실제로 다이카 연간에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는 일본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쟁점 중 하나이다.

2. 4. 대외 관계

고토쿠 천황 재위 중에는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자주 사신이 방문하였다. 전통적인 우호 관계였던 백제 외에도, 당시 한반도에서 수세에 몰려 있던 신라 역시 사신을 보냈다. 다만, 《일본서기》는 신라 사신을 '인질'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일본 측의 시각이 반영된 윤색으로 여겨진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라에서 온 사신 중에는 훗날 신라의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는 김춘추도 포함되어 있었다.[20]

653년에는 당나라에 사절을 파견하려 했으나, 배가 좌초되는 바람에 모든 사절단이 당나라에 도착하지는 못하였다.

북쪽으로는 에미시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고시국 지역에 누타리노 사쿠(渟足柵)와 이와후네노 사쿠(磐舟柵)라는 두 개의 요새(성책)를 쌓았다. 또한 이 요새들을 방비하기 위해 주변 지역 주민들을 동원하는 사쿠코(柵戸) 제도를 시행했는데, 이는 일본 역사 기록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성책과 사쿠코의 사례이다.

2. 5. 나니와쿄 천도와 갈등

645년 고토쿠 천황은 오사카의 나니와 나가라노도요사키노 미야(오사카시 주오구)를 건설하고, 기존의 야마토국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6][15] 새로운 수도는 항구가 있어 해상 교역과 외교 활동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실질적인 권력은 황태자였던 나카노오에(中大兄)가 쥐고 있었다. 하쿠치 4년(653년), 나카노오에는 수도를 다시 야마토 지방으로 옮길 것을 천황에게 제안했으나, 고토쿠 천황은 이를 거절했다.[17]

이에 나카노오에는 천황의 의사를 무시하고, 상황(皇祖母尊) 고교쿠와 황후 하시히토노 히메미코, 동생 오아마 황자 등 왕족과 함께 독단적으로 야마토로 돌아가 버렸다.[17] 당시 조정의 신하들 대부분도 황태자를 따라 나니와를 떠나면서, 고토쿠 천황은 홀로 궁궐에 남겨지게 되었다. 크게 낙담한[17] 고토쿠 천황은 이듬해인 654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6][17] 향년 59세였다.[17]

고토쿠 천황이 사망한 후에도 황태자 나카노오에는 바로 즉위하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이자 고토쿠 천황의 누나인 고교쿠 천황이 사이메이 천황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다시 천황 자리에 올랐다.[6]

2. 6. 사망 이후

고토쿠 천황이 사망한 후에도 황태자였던 나카노오에 황태자는 바로 즉위하지 않았다. 대신 고토쿠 천황의 누나이자 선대 천황이었던 고교쿠 천황이 사이메이 천황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즉위하였다.

3. 연표

wikitext

고토쿠 천황 재위 기간 주요 연표
연도 (연호)날짜주요 사건
645년 (다이카 원년)6월 12일나카노오에 황자가 소가노 이루카를 궁궐에서 살해함 (을사의 변).
6월 13일소가노 에미시가 자택에 불을 지르고 자살함. 이로써 소가씨 본종 가문이 멸망함.
6월 14일고쿄쿠 천황이 양위하고 고토쿠 천황이 즉위함. 고쿄쿠 천황은 황조모(皇祖母)가 되고, 나카노오에 황자가 황태자가 됨.
6월 19일여러 신하들을 모아 충성을 맹세하게 함.
(날짜 불명)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연호를 제정하여 다이카(大化)로 함.
7월 2일황후 하시히토노 황녀와 비(妃) 2명을 책봉함.
7월 10일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신이 내방함. 임나의 조(調)를 대행한 백제 사신에게 조의 부족함을 질책함.
7월 14일오와리 국과 미노 국에 신에게 바치는 폐(幣)를 부과함.
8월 5일동국(東國) 등에 고쿠시(国司)를 임명하고 호적 작성, 토지 조사 등을 명령함. 조정에 종을 설치하여 소송 지연 시 백성이 칠 수 있게 함. 양민과 노비 자녀의 신분 구분을 정함.
8월 8일불교 지원을 약속하고 승려 민(旻) 등 10명을 십사(十師)로 삼음.
9월 1일사신을 파견하여 여러 쿠니(國)의 무기를 관리하게 함.
9월 3일후루히토노오에 황자가 모반을 꾀함.
9월 12일나카노오에 황자가 후루히토노오에 황자를 토벌함. (다른 기록에는 11월 30일 또는 11월)
9월 19일토지 대차를 금지함.
12월 9일수도를 아스카에서 나니와 나가라토요사키 궁(難波長柄豊碕宮)으로 옮김.
646년 (다이카 2년)1월 1일개신의 조(改新の詔)를 선포하여 공지공민제, 조세 제도 개혁 등 새로운 정책 방향을 제시함.
1월코다이리큐(小郡宮)로 행차함. 여러 쿠니에 효고(兵庫, 무기고)를 세우게 함.
2월 15일백성의 투서를 받기 위한 함(匭)을 설치함.
2월 22일코다이리큐에서 돌아옴. 고구려, 백제, 임나, 신라 사신이 조부(調賦)를 바침.
3월 2일동국 국사들에게 훈계하는 조서를 내림.
3월 19일동국의 조집사(造集使)에게 국사의 잘못을 꾸짖고 훈계하는 조서를 내림.
3월 20일나카노오에 황자가 자신의 입부(入部)와 둔창(屯倉)을 천황에게 헌납함.
3월 22일왕족, 신하, 서민의 묘지 제도를 정하고 순장을 금지함. 점술 등 미신 행위를 금지함. 상경 시 말 사육 위탁 등록제를 실시하고 부정행위를 금지함. 시장과 나루터 이용자에게 토지를 주고 통행료 징수를 폐지함.
8월 14일품부(品部)와 부곡(部曲)을 폐지하고, 백관(百官)을 설치하며 관위를 수여하는 방침을 조서로 내림.
9월다카무코노 구로마로(高向玄理)를 신라에 파견하여 임나의 조 폐지를 논의하게 함. 에비모리(恵V森) 행궁으로 행차함.
647년 (다이카 3년)1월 26일고구려와 신라 사신이 조부를 바침.
4월 26일황자, 군신, 백성에게 관위를 수여하는 취지를 조서로 내림.
(날짜 불명)소군(小郡)을 헐고 궁을 지음. 관위 소지자의 출사 예법을 정함. 아베노 히라후(阿倍比羅夫)가 잘못된 수로 공사를 하여 나니와로 물을 끌어들이려다 간언을 듣고 중지함.
10월 11일아리마 온천으로 행차함.
12월 30일무코(務古) 행궁으로 행차함.
(날짜 불명)칠색십삼계(七色十三階)의 관위를 제정함. 신라가 김춘추(후의 태종무열왕)를 왜국에 파견하여 다카무코노 구로마로 등을 보냄. 김춘추는 인질로 머무름. 누타리 책(渟足柵)을 축조하고 책호(柵戸)를 둠.
648년 (다이카 4년)2월 1일삼한(고구려, 백제, 신라)에 학문승을 파견함.
4월 1일기존의 관(冠) 제도를 폐지함. 단, 좌우대신은 기존 관을 계속 사용함.
(날짜 불명)신라가 사신을 보내 조(調)를 바침. 이와후네 책(磐舟柵)을 정비하여 에미시(蝦夷)에 대비하고, 고시 국과 시나노 국 백성을 뽑아 처음으로 책호(柵戸)를 둠.
649년 (다이카 5년)2월십구계(十九階)의 관위를 제정함. 다카무코노 구로마로와 승려 민(旻)에게 명하여 팔성백관(八省百官)을 설치하게 함.
3월 17일아베노 구라하시마로가 죽자 천황이 주작문으로 나와 애도함.
3월 24일소가노 히무카(蘇我日向)가 황태자에게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를 참소함. 천황이 군사를 일으키자 이시카와마로는 도망침.
3월 25일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가 야마다데라에서 자살함.
3월 26일추격군이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의 목을 벰.
4월 20일고세노 도쿠타를 좌대신으로, 오토모노 나가토코를 우대신으로 삼음.
5월 1일미와노 시키오(三輪色夫)와 가모노 가쿠마로(掃部角麻呂)를 신라에 파견함.
(날짜 불명)신라가 김다수를 보내 인질로 삼음.
650년 (백치 원년)1월 1일아지노미야(味経宮)로 행차하여 신년 하례를 받고 당일 돌아옴.
2월 9일나가토 국 국사 구사카베노 시코에(草壁醜経)가 흰 (白雉)을 헌상함.
2월 15일흰 꿩을 보는 의식을 행하고 대사면령을 내림. 연호를 백치(白雉)로 개원함. 나가토 국에서의 매 사냥을 금지하고 동국의 조세를 3년간 면제함.
4월신라가 사신을 보내 조를 바침.
10월궁궐 부지 조성을 위해 묘를 옮기거나 집을 철거한 사람들에게 보상하고, 아베노 히라후에게 궁의 경계 표지를 세우게 함.
(날짜 불명)야마구치노 오구치(山口大口)가 조서를 받고 천 개의 불상을 조각함. 아키 국에 백제식 배 2척을 건조하게 함.
651년 (백치 2년)6월백제와 신라가 사신을 보내 조를 바치고 물건을 헌납함.
12월 30일대군(大郡)에서 새로운 나니와 나가라토요사키 궁으로 옮김 (다이카 원년 12월 9일 기록과 유사).
(날짜 불명)신라 사신 지만(知萬)이 당나라 복식을 하고 쓰쿠시 국에 도착하자, 복식 변경을 꾸짖어 돌려보냄.
652년 (백치 3년)1월 1일원일례(元日礼)를 마치고 대군 궁(大郡宮)으로 행차함.
?월반전(班田)을 완료함.
3월나니와 궁으로 돌아옴.
4월 15일승려 혜은(慧隠)을 내리(内裏)로 불러 『무량수경』을 강의하게 함. 사문(沙門) 혜자(慧資)를 논의자로 하고, 승려 1,000명을 청중으로 삼음.
4월 20일강의를 마침.
4월호적을 작성함. 백제와 신라가 사신을 보내 조를 바치고 물건을 헌납함.
9월나니와 궁이 완성됨.
12월 30일전국의 승려와 비구를 내리에 불러 설재(設斎), 대사면, 연명(燃燈)을 행함.
653년 (백치 4년)5월 12일견당사를 파견함. 제1선 대사는 기시노 나가타니(吉士長丹), 부사는 기시노 고마(吉士駒). 제2선 대사는 다카다 네마로(高田根麻呂), 부사는 소모노 고마로(掃守小麻呂).
5월병중인 승려 민을 문병함 (백치 5년 7월 기록도 있음).
6월백제와 신라가 사신을 보내 조를 바치고 물건을 헌납함. 승려 민의 사망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선물을 함. 민을 위해 많은 불상과 보살상을 만들어 야마다데라에 안치함.
7월난파된 견당사선(다카다 네마로 선박) 생존자 5명 중 뗏목을 만들어 구조를 요청한 문무관 긴(蚊無掻)을 포상하고 지위를 높여줌.
(날짜 불명)황태자(나카노오에 황자)가 야마토(倭京)로 환도할 것을 청했으나 천황이 불허함. 황태자는 황조모(고쿄쿠 천황), 황후(하시히토노 황녀), 동생(간인 황자)과 함께 야마토의 아스카 강변 행궁으로 떠남. 공경대부와 백관들도 모두 따라감. 천황은 이를 원망하며 황위를 버리고 싶어 야마사키에 궁을 짓게 하고 황후에게 노래를 보냄.
654년 (백치 5년)1월 5일나카토미노 가마타리에게 자관(紫冠)을 수여하고 봉호(封戸)를 늘려줌.
2월견당사를 파견함. 압사(押使)는 다카무코노 구로마로, 대사는 가와베노 마로(河辺麻呂), 부사는 야쿠시노 에니치(薬師恵日) (5월 기록도 있음).
7월 24일서해 사신 기시노 나가타니 등이 백제와 신라의 송사(送使)와 함께 쓰쿠시에 도착함.
10월 1일천황의 병환 소식을 듣고 황태자가 황조모, 황후, 황제, 공경 등을 이끌고 나니와 궁으로 돌아옴.
10월 10일붕어함.
12월 8일오사카 이소나가 능(大坂磯長陵)에 매장됨. 이날 황태자와 황조모는 야마토 강변 행궁으로 돌아감.
(날짜 불명)고구려, 백제, 신라가 조문 사절을 파견함.
655년 (사이메이 천황 원년)1월 3일황조모(고쿄쿠 천황)가 아스카 이타부타 궁에서 다시 즉위함(중조).


4. 가계도


  • '''조부''' : 오시사카노히코히토노오오에노황자(押坂彦人大兄皇子) [13]
  • '''조모''' : 오오타마노왕(大俣王) [13]
  • '''아버지''' : 치누노왕(茅渟王) [13]
  • '''어머니''' : 키비히메노왕(吉備姫王) [13]


'''배우자 및 자녀'''
구분이름비고자녀
황후하시히토노황녀(間人皇女, ?~665)죠메이 천황과 고교쿠 천황의 딸해당 없음
(妃)오타라시히메(小足媛)아베노 우치마로(阿倍内麻呂, ?~649)의 딸아리마노황자(有間皇子, 640~658)
치노이라츠메(乳娘)소가노 쿠라노야마다노이시카와노마로(蘇我倉山田石川麻呂, ?~649)의 딸해당 없음


5. 관련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Imperial Household Agency http://www.kunaicho.[...]
[2]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1959
[3]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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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간행물 法道 http://rekishi.jkn21[...] Shogakukan 2012-10-03
[1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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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0-04-30
[1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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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문서
[17] 서적 『続群書類従 第29輯ノ上 雑部』 続群書類従完成会 1925
[18] 서적 大化改新―六四五年六月の宮廷革命 中央公論新社 1993
[19] 문서
[2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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